장례문화에 남은 일제의 흔적


앞에 잠깐 언급했듯이 현재 가장 많이 선택하는 수의인 삼베는 과거 천민이나 노비가 입었던 직물입니다. 조선 시대 출토 복식을 고증해 신형 전통 수의를 개발하고 있는 단국대학교 전통복식연구소(소장 최연우 교수)에 따르면 삼베는 가난한 일부 백성이 비단 수의를 마련할 여건이 되지 않을 때 썼습니다. 그리고 본래 삼베는 고인이 아니라 고인의 가족과 친척이 입는 상복으로 쓰였습니다. 유가족이 죄인이라는 뜻으로 거친 삼베를 입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1934년 일제가 ⟪의례준칙⟫을 규정하여 비단 수의 전통을 금지하고 포목(布木: 삼베와 무명)으로 수의를 마련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수의(壽衣)가 아니라 수의(囚衣) 즉 ‘죄인의 옷’을 뜻하는 옷을 고인에게 입혀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수의는 고인을 잘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삼베는 고인보다 오히려 더 빨리 썩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수의로는 부적합한 소재여서 우리 조상들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일부 업자들이 수의는 잘 썩어야 합니다는 말로 이를 호도하고 있습니다.
옷이라는 것은 상황에 맞게 입어야 합니다. 운동할 때는 운동복을, 군인은 군복을, 결혼식에는 결혼 예복을 갖추어 입어야 합니다. 장례식도 예를 갖추는 행위이므로 이에 걸맞은 옷을 입히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관리는 관복을, 선비는 유학자들이 입던 심의를, 여성은 혼례복 등으로 입던 원삼을’ 수의로 사용했다고 최연우 교수는 밝히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의례준칙⟫을 만들어 삼베 수의를 입도록 강제한 데에는 몇 가지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민족 전통 말살입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짓밟고 없애야 그들이 원하는 황국 식민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 교화 자료를 통하여 철저히 우리의 우수한 전통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둘째는 경제 수탈입니다. 일제는 군국주의를 앞세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에는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주축 국이 된 일본은 막대한 전쟁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금⦁은⦁동⦁철과 같은 광물과 누에고치 그리고 심지어는 숟가락과 젓가락, 밥그릇까지 닥치는 대로 수탈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조선 백성들에게 돌아갈 비단은 단 한 자도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제는 삼베를 장려해 대마를 재배하게 함으로써 조선인들이 자연스럽게 대마초에 빠져들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망가뜨려서 나라 잃은 설움과 고된 일상을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항일 의지를 꺾어 영원히 식민 지배를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일제가 이렇게 간악한 의도로 삼베 수의를 입으라고 강제한 것이 1934년입니다. 9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장례의 주권을 찾지 못하고 소중한 가족을 마땅한 장례 예복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조오례의⟫가 정한 우리의 수의는 비단이나 명주 또는 모시와 무명입니다. 혹자는 전통이라고 무조건 따라야 하느냐고 반론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삼베 수의에 한해서만큼은 그 오도된 역사가 명백하므로 지금이라도 분별 있는 판단을 해야 합니다.


‘삼베’는 삼으로 짠 천으로 ‘베’, ‘대마포’라고도 합니다. 삼 껍질의 안쪽에 있는 인피섬유를 이용해서 짜는데 수분을 빨리 흡수⦁배출하고 자외선을 차단하며 곰팡이를 억제하는 항균성과 항독성이 있습니다. 견고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게 특징이지요. 예부터 포 폭에 일정한 규격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 이전에는 포 폭이 약 50cm,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약 36cm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수직으로 직조하며 길이 6자(1자=30.3cm), 폭 2자인 필(筆)을 기본 단위로 합니다.
삼베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의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직물이며 원단은 대부분 중국산이고 국내 생산은 미미합니다. 그런데 삼베를 수의로 쓰기 시작한 것이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조선총독부를 통하여 강제로 시행한 사회교화자료 ⟪의례준칙⟫에 의하여 삼베를 수의로 지정한 뒤로 대부분 장례에서 고인의 수의로 삼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에 따르면 수의는 고인이 가장 아끼는 옷 또는 귀한 옷으로 선별하고 그 재질은 비단이나 명주 또는 모시나 무명(면직물)을 사용합니다. 일본이 수의로 지정한 삼베는 천민이나 노비 또는 죄인, 상주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전통적으로 가난과 흉복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온 직물입니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사회교화자료 10집인 ⟪의례준칙⟫에서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조선의 전통 의례인 혼례, 상례, 제례 등이 “구태가 의연하여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준칙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수의의 소재로 ‘포’나 ‘목’, 즉 ‘베’나 ‘무명’을 쓰고 값비싼 비단은 사용하지 말도록 규정했습니다. 삼베 수의는 우리 전통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시행한 왜곡되고 변질한 문화이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흔히 모시로 불리는 저마는 ‘쐐기풀과에 속하는 모시풀의 인피섬유로 제작한 직물’입니다. ‘저(苧, 紵)’, ‘저포(苧布, 紵布)’, ‘저마포(苧麻布, 紵麻布)’ 등 다양한 이름으로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시는 우리나라와 인도, 중국에서 고대부터 재배하고 사용했는데 오늘날에는 열대⦁아열대 지역의 여러 곳에서 재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시는 단아하고 청아함을 복식미의 극치로 여긴 우리 민족이 가장 선호한 직물이었습니다. 모시는 고급 소재이나 현재는 그 지위를 수의에 관한 한 삼베에 물려준 상태입니다. 고인의 수의를 모시로 사용하면 후손의 머리가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서 삼베 업자들이 퍼뜨린 속설로 추측됩니다.
아마는 아마과에 속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입니다.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이며, 섬유작물로 재배되고 있습니다. 아마는 목화 다음가는 중요한 섬유작물로 목화보다 좋은 점이 많아서 5천 년 전부터 인도나 이집트에서 옷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는 유럽에서 섬유작물로 1위를 차지했지만, 솜 방직기계가 발명되면서부터 목화에 밀려 이용 범위가 줄어들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재배되지 않는 작물입니다.
현재 아마는 단독으로는 수의 재료로 쓰이지 않습니다. 대마와 아마, 저마와 아마, 대마⦁아마 및 저마의 혼합 형태의 제품에 사용됩니다.
인견은 인조견(人造絹), 다시 말해 ‘사람이 만든 명주실로 짠 견사(비단)’를 말합니다. 100% 레이온사로 제작한 재생섬유 옷감이며 ‘인조’로 불리기도 합니다. 통기성이 좋아 시원한 소재의 여름옷으로 인식되어 수의보다는 평상복으로 흔히 알려졌지요. 인견은 겉으로 보기에 비단과 비슷해서 이를 비단 수의라고 속여서 판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견과 비단은 전혀 다른 섬유입니다. 간혹 화장용 수의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수의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합성섬유인 나일론은 오늘날 화장용 수의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고인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화장하든 매장을 하든 나일론 섬유는 수의로 쓰면 안 되는 옷감입니다. 화장과 매장 어느 방식에 사용해도 유골과 주검에 모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례는 각 민족이 고유하게 세우고 지켜 온 소중한 전통 예법입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고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세상과 이별하게 했지요. 이토록 경건한 의식이 일부 업자들에 의해 변질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비단은 명주실로 광택이 나게 짠 피륙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비단(견직물)을 주로 사용하되 모시나 무명(면직물)도 쓰도록 했습니다. 실제 전통 장례에서는 ‘생전에 입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옷’을 사용하기도 했지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삼베는 우리의 전통과는 무관하게 일제가 강제한 잘못된 문화입니다.
우리의 전통에 가장 부합하고 부모나 가족에 대한 최고의 예를 갖추며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매장 시에는 비단이나 모시가 현시대에 가장 적합한 수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대부분 삼베가 이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삼베 수의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수의로 삼베를 고집하는 유가족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의 경제 수준은 조선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고인에게 입히지 않았던 옷을 소중한 가족에게 입힐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제부터라도 우리 전통의 장례 문화를 정립해야 합니다.
현재 수의로는 앞에 나열한 여섯 종류가 대부분 사용됩니다. 이 외에도 대마와 아마, 대마와 저마, 대마와 나일론 등과 같이 혼합한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주 즉 유가족이 차는 완장이나 상장 역시 우리 전통에는 없던 형식입니다. 이것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조선 백성의 집회를 효율적으로 막고 독립투사들을 효과적으로 검거하기 위해 썼던 방법으로 추정합니다. 이 역시 조선총독부의 사회교화자료 10집에 명시되어 강제된 것이 현재에 이르렀고, 세 줄짜리 완장이니 두 줄짜리 완장이니 하는 것은 상조회사들이 상주와 유가족 그리고 친인척을 쉽게 구분하기 위해 만든 형식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장례가 되기 위해서는 상장과 완장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단 꽃장식은 일제강점기의 문화는 아니나 상조회사가 일본의 상조서비스를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유입된 형식입니다. 일본을 따라 하다 보니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를 영정 사진 주변을 비롯한 제단에 장식하는 것이 보편화하였습니다. 국화는 일본 황실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일본의 공공 기관에서 형상화하여 쓰고 있는 문양입니다. 일본에서 유입된 문화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양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제단 꽃장식을 굳이 국화로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전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꽃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을 쓰는 편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국화를 대체할 꽃으로는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가 가장 좋겠지만, 계절을 타는 꽃이라 사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에 감사의 뜻으로 쓰는 ‘카네이션’은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사랑, 감사, 존경’이므로 고인의 제단 장식하는 꽃으로 어울립니다.
이때도 전체 제단 장식을 카네이션으로 할 필요는 없고 다양한 계절 꽃과 함께 사용한다면 무리가 없을뿐더러 고인을 기리는 제단이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꽃 말고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병풍을 제단에 두르는 것도 또 다른 대안일 수 있습니다. 병풍은 꽃보다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전통의 의미도 되살리는 것이어서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장례식이 될 수 있도록 교회에서 기독교 장례예식을 정립하고 표준 장례지침서를 만들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필자의 소망입니다.
결론적으로 - 매장 시 수의(壽衣)는 삼베가 아니라 비단 또는 모시 수의(예복)를 사용하기를 제안 합니다. 가격 면에서도 삼베 수의보다 더 저렴할 수가 있습니다. 화장 시는 양복이나 한복 또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 입던 옷을 입혀드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삼베 수의, 완장, 상장은 일제의 잔재들로써 소중한 가족의 장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특히 기독교 장례에는 맞지 않으니 사용하질 않기를 제안 드립니다. 역사적 사실을 반드시 인지하시고 올바른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단 꽃장식에 대해서는 이미도 말씀드렸지만,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문화가 상조회사의 벤치마킹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전통에서는 병풍을 상용하였으나 시대가 변하였으므로 제단 장식을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국화가 아닌 카네이션이나 계절 꽃등을 사용할 것을 권면합니다. 카네이션은 사랑, 감사, 존경의 꽃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중앙일보] 입력 2015.04.04 00:52 수정 2015.04.06 14:46

요즘 한국의 장례 문화에는 우리 고유의 전통과 서양식이 뒤섞여 있습니다. 상복이 대표적이다. [중앙포토]
2014년1월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이대목동병원에 차려진 빈소는 고인을 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그런데 빈소는 일제35년 통치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일제라면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고(故)황 할머니의 빈소에서 말이다.무엇이 잘못됐을까.중앙일보는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우리 장례문화의 일제 잔재를 추적했다.
전통인 듯 전통 아닌 장례문화
1934년 조선총독부‘의례준칙’발표
관혼상제 예법 개선한다며 싹 바꿔
관혼상제(冠婚喪祭)로 대표하는 우리 전통의례(儀禮)는 일제가 훼손한 대표적 사례다.
1934년11월10일 조선총독부는‘의례준칙’을 발표했다.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이렇게 설명했다. “생활양식 중 각종 의례는 구태가 의연하여 오히려 개선할 여지가 적지 않다.그중에 혼인⦁장례⦁제사의 형식과 관례는 지나치게 번잡하여 엄숙하여야 할 의례도 종종 자질구레 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마음을 쓰게 되어 그 정신을 망각하지 아니할까 봐 우려될 정도에 이르렀다.지금에 와서 이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민중의 피해를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방의 발전과 국력의 신장을 저해하는 일이 실로 적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의 전통 의례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번잡하니 이를 개혁하겠다는 뜻이다.김시덕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과장)은“관혼상제가 우리 문화에서 차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를 바꿔 일제 식민통치를 더 굳건하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분석했다. ‘석전대제’(공자 등 성현을 제사 지내는 의식)예능 보유자 권오흥 씨는“유교는 예를 우주의 질서로 생각했고,의례는 예를 표현하는 방법이라며 중요하게 여겼다”고 설명했다.
조선총독부 의례준칙에 따라 눈에 띄게 변한 건 상복이다.전통 상복인 굴건제복(屈巾祭服,거친 삼베로 만든 옷)을 생략하고 두루마기와 두건을 입도록 만들었다.유가족이 한복이나 일본 전통복장을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나비 모양의 검은 리본을 달도록 했다.또 양복을 입은 사람은 왼쪽 팔에 검은 완장을 달게 했다.황 할머니 빈소에서 봤던 상장(喪章)과 완장의 시작이다.
상장과 완장은 항일인사들이 장례식에 모여 집회를 열지 못하도록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광복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다. 1969년‘가정의례준칙’은 삼베로 만든 상장을 가슴에 달도록 규정했다. 2009년‘건전 가정의례준칙’에도 상장 조항이 있습니다.
완장은 가정의례준칙에선 빠졌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박태호 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은“최근엔 아예 완장이 군 계급장처럼 변질 했다.”며“넉 줄 완장은 맏 상주가,석줄 은 나머지 아들들이,두 줄은 사위가,한 줄은 손자·형제 등이 각각 팔에 두리는것이 마치 전통인 것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례식장의 꽃도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1926년 순종 국장 장례식 사진첩에 따르면 영좌 주변에 화환이 놓인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서양에선 장미⦁카네이션⦁국화 따위로 만든 꽃다발이나 화환을 바치는 문화가 내려온다.전통 장례에 사용된 꽃은 수파련(水波蓮)이라고 상여에 다는 종이꽃이 전부였다.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거부감이 있었다고 한다.권 씨는“1970년대 안동 지역의 유림(儒林)빈소에 지역 국회의원이 화환을 보냈는데,어르신들이‘상갓집에 무슨 꽃이냐!’며 짓밟은 걸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헌화나 화환 문화가 서양에서 비롯된 것이라 치더라도 요즘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는 꽃 장식은100%일본식이다.우리 전통은 영좌 뒤에 병풍을 치는 것이었다.황 할머니의 영정 주변에 꽃을 입체적으로 배치하고 단을 높게 쌓는 스타일은2000년대 일본 유행을 그대로 따라 했다.이철영(을지대, 장례지도학)는“영좌를 꽃으로 장식하는 건 일본 문화”라며“1980년대 일본의 상조 문화가 부산에 처음 상륙했을 때 꽃장식이 함께 유입됐다.”고 말했다.익명을 요구하는 장례업자는 장례업계에선 “매년 일본 전문가를 불러오거나 일본으로 건너가 최신 꽃장식을 배운다.”며“요즘 꽃장식이 더 화려해지고 있는데,이 역시 일본을 따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삼베 수의가 황 할머니 장례에 쓰였다.삼베 수의가 전통 수의(壽衣)의 대표가 돼버린 배경에도 일제가 있습니다.우리 전통은 수의는 생전 입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걸로 마련하는 거였다.그래서 묘 이장(移葬)과정에서 발견된 조선 시대 수의를 보면 화려하다.대개 비단이나 명주로 만들어졌다.부모를 여읜 자식이‘나는 죄인’이라는 뜻으로 삼베 상복을 입었다.박성실 단국대 명예교수(의상학)는“조선의 일부 극빈층이 삼베 수의를 썼을 수도 있지만,현재 발굴된 건 없다.”며“수의가 생전에 입던 옷이라 목덜미나 소매에 때가 탄 경우도 있습니다.”고 말했다.
일제는34년 의례준칙과 더불어 펴낸『조선총독부 제정의 의례준칙과 그 해설의 상례』에서“수의는 포목 등을 쓰고,비단 등 값비싼 걸 사용하지 말라.”고 썼다. 1942년‘조선 잠사 통제령’을 내려 조선에서 생산된 누에고치의 일정량을 일제에 강제로 판매하도록 했다.
김 과장은“일제가 만주사변⦁중일전쟁⦁2차대전 등 전쟁에 동원할 자원과 물자를 약탈해 가면서 조선의 경제 사정은 궁핍해졌다.그러면서 좀 더 구하기 쉬운 삼베 수의가 보급된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박 실장은“1976년 대마관리법이 만들어진 뒤 삼베 값이 크게 오르면서 장례업계가‘삼베 수의가 고급’이라는 인식을 퍼뜨렸다.”고 말했다.
하이패밀리 등 일부 시민단체는 평상복을 수의로 쓰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아직 큰 반향은 없다.모시 수의를 쓰면 자손의 머리가 희어지고,명주 수의는 시신이 잘 썩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결국 황 할머니 빈소의 상장과 완장,꽃장식,삼베 수의는 일본 식민통치의 산물인 셈이다.이 교수는“국적 불명의 의례가 우리 전통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김 과장은“조선 시대 예송논쟁으로 정권이 교체될 정도로 의례문화가 발전했는데,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전통이 변질한 사실조차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박 실장은“1990년대 장례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하면서 장례비용이 갑작스럽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글=이철재⦁곽재민 기자⦋중앙일보⦌/사진=권혁재 사진 전문기자

